머리말
이 문서의 이름은 《자유로운 문서 포맷》이다. 당신이 읽고 있는 이 문서는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문서 포맷이 더 나은 방식으로 구현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이 문서 포맷 자체도 위지윅(WYSIWYG) 소프트웨어인 인디자인(InDesign)을 사용하지 않고,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 및 마크업 코드로 작성 및 조판되었다. 문서와 책의 자유를 향한 변화를 꿈꾸며, 그 변화를 같이 상상하자고 제안한다.
대학을 다니며 디자이너로 일하게 되면서, 문서의 포맷에 대한 질문이 시작되었다. 문서를 작성하고, 형식을 만들고, 공유하고 읽는 과정을 더욱 유기적으로 연결할 수는 없을까? 왜 주어진 도구를 단지 수용하면서 사용해야 할까? 반복적인 작업을 더 효율적으로 해결할 방법이 있지 않을까?
당신은 지금 종이 위에 인쇄된 《자유로운 문서 포맷》을 읽고 있지만, 이 문서의 원고는 워드프로세서로 작성된 디지털 포맷으로 존재한다. 만약 이 원고를 누군가에게 ‘공유’해야 한다면 우선 두 가지 방법을 떠올려 볼 수 있다. 문서를 온라인에 올리고 좌표(링크)를 공유하거나, 종이에 인쇄하여 공유하거나.
‘문서’라는 명칭에서 우리는 흔히 종이를 떠올린다. 하지만 오늘날 문서를 작성하고 공유하는 모든 과정은 스크린 너머에서 이루어진다. 달리 말하면 우리는 컴퓨터를 통해 문서를 작성하고 공유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읽는 문서의 모습은 컴퓨터 혹은 소프트웨어에 의해 결정된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텍스트 아래에 그것을 담는 그릇인 ‘문서 포맷’이 존재하며, 그 포맷에 의탁하여 텍스트가 존재하고 공유된다는 명제는 자주 무시된다. 포맷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떻게 생겼는지에 따라 거기에 담긴 텍스트가 아주 다른 모습을 띠게 되는데도 말이다. 텍스트의 형태와 성격은 그것을 담고 있는 포맷에 따라 결정되지만, 우리는 문서에 포맷이 존재한다는 사실마저 잊곤 한다.
오늘날 문서 대부분은 독점적인 지위를 가진 소수의 소프트웨어에 의해 작성되고 있으며, 출판 산업은 놀랍게도 하나의 소프트웨어와 포맷이 전체 제작 과정을 장악하고 있다. 하지만 사용자 대부분은 이런 소프트웨어의 작동 원리를 완벽히 이해할 수 없기에 결국 소프트웨어의 소비자로 전락해 버리게 된다.
앞으로 문서의 포맷과 출판의 방식은 어떻게 달라질 수 있을까? 다시 말해, 포스트디지털 시대의 텍스트가 더 자유롭게 생산되고 소비될 수 있는 방식은 무엇일까? 나아가 디지털 시대의 문서 제작과 출판은 어떠해야 할까? 이 질문에 답해보기 위해, 이 문서 《자유로운 문서 포맷》은 새로운 문서 포맷에 관한 생각을 크게 세 개의 장으로 구분해서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첫 번째 장 ‘포스트디지털 프린트’는 문서의 ‘전자성’에 대한 질문이다. ‘전자 출판’이란 무엇인가? 전통적인 종이책 출판과 무엇이 다른가? 전자적인 성질이 문서의 생산과 소비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출판’이라는 단어는 일반적으로 전통적인 이미지를 동반한다. 이 때문에 프리 디지털 프린트(pre-digital print)와 포스트디지털 프린트(post-digital print)는 늘 이분법적으로 비교되었다. 이는 웹 및 전자 문서가 종이책을 대체할 것이라는 관점에서 전자 출판과 전자 문서를 이해하겠다는 것과 같다. 지금까지의 전자 문서 포맷에 대한 논의가 대부분 이러한 방식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전자 출판은 새로운 대체재 혹은 일종의 구세주로 그려지곤 했다. 하지만, 이 적대적인 이분법적 구도는 솔직히 지겹다고 말하고 싶다. 지금은 하이브리드 개념이 등장한 지도 꽤 시간이 지난 시점이다. 우리는 대결 프레임을 벗어나 아직도 등장하지 않은 ‘진정한 전자책’에 대해 논의해야 한다. 이를 통해, 진정한 전자 문서는 종이의 대체재가 아닌 ‘종이에 다시 인쇄될 수 없는’ 문서라는 것을 밝힐 것이다.
두 번째 장 ‘자유로운 문서 포맷’에서는 ‘자유로운’ 전자 문서는 어떤 고유한 특징을 갖는지 (혹은 가질 수 있는지) 살펴볼 것이다. 유연성, 접근성, 연결성이라는 세 가지 성질을 바탕으로 전자 문서 포맷이 무언가의 대안이 아닌 고유한 역할과 성격을 갖는 새로운 형식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정의하며, 우리가 추구하는 새로운 문서 포맷이 가져야 할 성질에 관해 이야기할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단계에서 새로운 문서 포맷을 만드는 방법은 무엇일까? 세 번째 장인 ‘도구 사용의 자유’에서는 문서를 생산, 공유, 소비하는 방식에 관해 이야기한다. 출판을 위해 사용하는 소프트웨어의 독점 문제와, 이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되는 오픈 소스에 대해 논의할 것이다. 자유로운 문서는 자유로운 방식을 통해 제작되고 공유되어야 한다.
마지막 장인 ‘이 문서에 대해’에서는 새로운 문서 포맷을 시도한 하나의 사례로서 《자유로운 문서 포맷》이 어떤 방식을 통해 책으로 제작되었는지 이야기한다. 기획 단계부터의 상세한 설명보다는 기술적 대안을 소개하고 공유하는 데 집중했다. 스스로 탐험해보며 책을 제작하는 과정을 관리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최대한 최신의 기술과 논의를 전하고자 노력했다. 전자 문서 포맷에 비평과 논의는 현재진행형으로 이루어지고 있고 지금도 많은 시도와 시행착오가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문서 《자유로운 문서 포맷》은 미지의 영역을 함께 탐험하기를 기대하며 여러분께 보내는 일종의 초대장이다. 문서를 작성하고 공유하는 완벽한 새로운 방식을 아직은 누구도 자신 있게 제안할 수 없지만, 현재의 고민을 공유하고 함께 선택지를 만들어 나갈 수는 있을 것이다. 적어도 《자유로운 문서 포맷》을 통해 새로운 문서 포맷에 대한 질문과 상상이 이어지기를 기대하며 문서를 시작한다.
1. 포스트디지털 프린트
알레산드로 루도비코(Alessandro Ludovico)는 2012년 펴낸 《포스트디지털 프린트: 1894년 이후 출판의 변화》에서 “우리 시대에 종이책은 죽었는가? 스크린은 종이를 살해할 것인가?”라고 질문한다.1 책의 제목에 등장하는 1894년은, 옥타브 우잔느(Octave Uzanne)와 알베르 로비다(Albert Robida)의 삽화집 《책의 종말(La Fin Des Livres)》2에서 따온 것으로, 루도비코는 1894년부터 종이책을 없애려는 시도가 이어져 왔다고 이야기한다. 18세기 중반은 전보가 도입되면서 장거리로 메시지를 전송할 수 있게 되었던 시기였다. 멀리 떨어진 장소를 순식간에 연결하는 경험은 사람들이 정보를 다루는 방식과 인식을 변화시켰다. 이렇게 변화하는 미디어 환경 속에서, 우잔느는 책에서 정적인 인쇄물 대신 오늘날의 주문형(on demand)과 같은 플랫폼을 통해 모든 콘텐츠가 음성을 통해 전달될 것이라고 미래의 출판을 전망했다. 그는 기존의 눈을 이용한 독서 방식이 피로와 무관심을 초래한다고 주장하며, 새로운 오디오 매체가 시각적 피로로부터 사람들을 해방해 눈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게 해 줄 것이라 믿었다. 로비다는 이러한 미래를 묘사하며, 소형 축음기가 보편화하여 사람들이 어디서나 문학 작품을 재생해 귀로 듣는 모습을 그렸다. 이는 팟캐스트나 오디오북처럼 언제 어디서나 음성으로 책의 내용을 접할 수 있는 오늘날의 디지털 환경과 꽤 일치한다. 우잔느의 미래 예견은 어느 정도 현대를 적절하게 예측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보통 월드와이드웹(World Wide Web, WWW), 가정용 컴퓨터, 아이패드, 전자책(E-book) 리더기와 같은 전자 출판 및 전자 문서 공유 포맷 등을 종이책의 대안으로 떠올린다. 그러나 텍스트 기반 매체뿐만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새로운 개념의 매체가 등장할 때마다 종이는 곧 사라질 것으로 여겨졌다. 전화, 레코드, 라디오, 텔레비전 등이 등장했을 때 이들은 낡은 매체의 대체재로, 종이책의 죽음을 견인할 무언가로 예견되었다. 그러나 종이책의 죽음은 아직도 오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아무도 종이책의 죽음을 말하지 않는다.
포스트디지털‘포스트디지털’이라는 용어는 미국의 작곡가 킴 카스코네가 2000년 《컴퓨터 음악 저널(Computer Music Journal)》에서 처음 사용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디지털 정보 시대의 혁명적 시기는 확실히 지나갔다. 디지털 기술의 영향은 어떤 식으로든 모든 사람에게 닿아 있다.”3 시대가 열린 지 오래지만 우리는 여전히 종이책이 쌓아 올린 관습에 따라 읽고 쓴다. 전자 문서를 작성하고 열람하는 방식 역시 종이책의 전통을 좇고 있다. 너무나 긴 시간 우리는 종이에 인쇄된 책의 인터페이스에 길들어 온 것 같다. 종이책의 죽음을 이야기하기에 아직도 종이책의 위상은 너무 공고해 보인다.
1.1. 하이브리드 그 이후
종이책과 전자책은 서로 다른 특성이 있으며 각각 장점이 있다. 이 중 하나도 놓치지 않기 위해 요즘에는 하나의 텍스트를 두 포맷 모두로 출판하는 경우가 많다. 나아가 두 포맷의 특성을 혼합한 문서 포맷을 만들어 보려는 노력도 이어지고 있다. 루도비코는 앞으로 디지털과 종이책을 결합한 하이브리드라고 불리는 혼합물이 더욱 많아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두 포맷이 본질적, 태생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면 서로에게 더욱 영향을 주며 새로운 포맷을 만들어 낼 것이고, 더는 ‘인쇄물’ 또는 ‘전자 출판물’로 분명하게 분류할 수 없을 때, 비로소 진정한 혼합 포맷 출판물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이를 사이버펑크(Cyberpunk) 메타포로 비유하며, 종이는 육체, 스크린은 금속이라고 설명한다. 종이와 픽셀은 서로 경쟁하면서도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맺으며, 불가분의 관계가 될 것이라고 보았다. 디지털 미디어는 인쇄 매체의 레이아웃 및 콘텐츠 관리 경험에 의존하고, 인쇄 매체는 디지털 미디어가 제공하는 무한한 색인화 및 검색 가능성에서 많은 이점을 얻는다. 결국 두 매체는 마치 사이버펑크 영화처럼 결합하여 정보와 문화를 전파하는 새로운 모델을 탄생시킬 것이라고 상상했다. 루도비코는 음악 샘플링이나 비디오 샘플링처럼 맞춤형 콘텐츠(모음집)를 만들 수 있는 프린트 샘플링(Print Sampling)을 상상하기도 했는데, 지금의 E-book이나 Web2Print4 시스템을 본다면 그 상상은 이미 현실이 되고 있다.
우리가 더 이상 ‘인쇄 출판’과 ‘전자 출판 (혹은 몇 가지 전자 기능이 있는 인쇄 출판)’ 만으로 출판을 범주화할 수 없을 때 진정한 혼종성이 도래할 것이다. 디지털과 인쇄의 장점을 창조적으로 결합함으로써, 새로운 형태의 출판물을 개발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될 것이다. 말하자면 디지털과 인쇄물의 경계를 초월한 출판 형식은 진정한 혼종성으로 나아가는 단계를 만들어낼 것이다.
그런데 더 나아가서, 디지털과 인쇄가 근원적으로 연결된 것이라는 것, 즉 하나의 나무라는 인식이 모두에게 상식이 되는 시대가 온다면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 ‘하이브리드’를 초월한 그다음엔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1.2. 뿌리의 재전유
상호 영향을 주는 사이라는 것을 이해한 뒤에는, 전자 출판 자체를 새롭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전자 출판은 단순히 책을 디지털 환경에 구현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디지털 문서는 ‘종이에 다시 인쇄될 수 없는’ 문서이다. 디지털화된 무언가가 아닌, 생산과 재현, 수용 조건이 디지털 매체를 떠나서는 가능하지 않은 문학이다(유현주, 2017).5
DTP6는 탁상출판(Desktop Publishing: DTP)의 약자로, 데스크톱 컴퓨터로 출판의 전 과정을 소화하는 것을 말한다. 보통 마이크로소프트 워드(Microsoft Word) 같은 위지윅(What You See Is What You Get: WYSIWYG)7 워드 프로세서/텍스트 편집기를 통해 글을 작성하고, 위지윅 그래픽•레이아웃 소프트웨어인 인디자인(InDesign)으로 디자인한 다음 PDF로 만들어 인쇄하는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탁상출판이 일상화된 오늘날, 디지털의 개입 없이 문서를 제작한다는 것을 상상하기란 어렵다. 당신이 손에 들고 있는 이 문서 《자유로운 문서 포맷》 역시 쓰고 디자인하는 모든 과정이 스크린 너머에서 이루어졌다. 문서 제작 과정을 나무가 자라는 것에 비유한다면, 디지털 환경은 일종의 뿌리이다. 하지만 ‘문서’라는 명칭에는 네모나게 재단된 종이의 이미지가 너무나 강하게 녹아있다. 그렇다 보니 종이로 된 문서나 책을 만들거나 읽는 과정에 개입된 디지털의 역할은 쉽게 간과되기도 한다. 하지만 현대 출판의 모든 과정을 떠받들고 있는 디지털이라는 전자적 뿌리를 재전유(re-appropriate)하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 이를 통해 오늘날 우리가 책을 만들고 소비하는 방식을 새로운 측면에서 인식하고 책의 전자적 성질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할 수 있다.
문서가 디지털 환경에서 제작된다고 해서, 디지털 환경에서 소비되는 문서가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종이로 된 문서나 책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이를 위한 전자 문서가 선행적으로 만들어진다고 이야기 하는 것이다. 탁상출판이 일반화 된 지도 한참이나 지난 지금 종이책을 디지털의 대척점에 두고 비교하는 일은 이제 더는 의미가 없다. 종이책과 전자 문서를 명확하게 구분하려는 이분법적 시도 역시 시대착오적이다. 전자 문서 때문에 종이책이 사라지지 않고, 종이책 때문에 전자 문서가 사라지지 않는다. 종이책과 전자 문서는 연결되어 있다. 둘은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하나의 뿌리에서 자라난 두 개의 가지일 뿐이다. 그 둘을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효과적으로 연결 짓고 관리할 것인지 고민해 보아야 한다.
1.2.1. 다시, 포스트디지털 프린트
위키피디아(Wikipedia)8와 PDF는 하이브리드 출판의 대두 이후 상호작용성의 개념을 살펴보기 좋은 사례이다. PDF는 원본 문서의 내용과 형태를 변형 없이 유지할 수 있는 무결성(Integrity)이 큰 장점이다. 이런 이유로 디지털로 제작된 문서를 그대로 책으로 옮겨내야 하는 종이책 출판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 반면, 위키(Wiki)나 월드와이드웹은 문서를 열람하거나 작성하는 과정에 사용자의 참여가 열려있는 개방성이 큰 장점이다. 하이퍼링크(Hyperlink)를 통해 문서들을 유기적으로 연결할 수 있고, 사용자는 링크로 연결된 문서 사이를 오가며 필요한 정보를 자유롭게 탐색할 수 있다. 이 같은 하이퍼텍스트(Hypertext) 시스템은 단방향으로 정보를 전달받는 PDF의 수동적인 읽기 경험과 달리, 다층적으로 정보를 탐색할 수 있는 적극적이고 비선형적인 경험을 제공한다. 또한 위키 시스템은 독자가 곧 저자가 되어 문서의 작성과 수정에 참여할 수 있는 민주적인 출판 형식을 띠고 있다. 이는 원본 문서의 재편집이 철저히 통제되는 PDF와 대조되는 웹 문서의 또 다른 특성이다. 웹 문서는 불특정 다수가 공동으로 작성하고 편집하는 것이 가능하여서 고정된 상태로 머무르지 않고 계속해서 업데이트될 가능성을 내포한다. 위키가 사용하는 마크다운(MarkDown)9과 같은 웹 문서 문법은 이와 같은 구조적 장점을 더욱 확대한다. 마크다운은 일종의 경량 마크업 언어(Markup language)10로 단순한 텍스트 서식 규칙(style)을 사용하여 쉽게 문서를 작성할 수 있게 해준다. 볼드, 이탤릭, 목록, 링크, 이미지 삽입 등과 같은 서식을 직관적으로 지정할 수 있어 복잡한 코드나 소프트웨어를 몰라도 웹 문서 작업이 가능하다.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서식 시스템을 통해 누구나 쉽게 텍스트를 구조화하고 시각적으로 표현해 손쉽게 웹 문서를 작성하고 협업할 수 있다. 즉, 웹 문서는 출판물의 ‘완성’을 전제하지 않으며 끊임없이 재구성되고 확장될 가능성의 매체로 기능한다.
확실성에 의존하는 인쇄물은 위키피디아의 끊임없이 매혹적으로 변화하고 유동하는 지식과 집단적인 지성으로 대체된다.11
2012년 브리태니커 백과사전(Encyclopedia Britannica)12이 종이책 인쇄를 중단하고 완전히 디지털 포맷으로 전환했다. 이는 당시 매우 충격적인 발표였고 많은 사람은 위키피디아의 영향력이 커진 결과로 해석했다. 하지만 종이책의 역할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분위기 역시 존재했으며, 이를 반영하듯 오히려 위키피디아의 내용을 종이책으로 인쇄하여 판매하는 여러 프로젝트가 등장했다.13 피디아프레스(PediaPress)14 는 위키피디아를 종이책으로 변환하는 ‘위키피디아 A부터 Z까지’라는 크라우드펀딩 캠페인으로 주목을 받았고, 지금도 사용자의 희망에 따라 위키피디아 내용을 주제별로 묶어 종이책으로 제공하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의 어떤 욕구가 위키피디아를 굳이 종이책으로 만들게 하는 것일까? 우리는 지면에 박제된 형태로 지식을 손에 넣음으로써 그것의 소유를 영구적으로 보장받는다는 안정감을 느낀다. 위키피디아 시대에도 이러한 물리적 소유에 대한 갈망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위키피디아를 종이에 인쇄하는 과정에서 실제로 무엇이 생산되는가? 이는 자유로운 공동 작성과 편집으로 끊임없이 발전하고 확장하는 웹 문서의 무한한 잠재성을 포기하고, 종이 위에 정보를 박제시키는 행위에 불과하다. 위키와 PDF의 비교는 단순히 두 포맷의 기술적 차이에 국한되지 않는다. PDF는 완성된 정보의 전달을 목표로 하지만, 위키와 같은 웹 문서는 무한한 상호 연결성과 확장성을 목표로 한다. 특히 하이퍼링크를 통한 정보의 확장은 독서의 경험 자체를 변화시킨다. 독자의 역할이 지면에서 제공하는 정보를 수동적으로 흡수하는 것을 넘어 웹 문서를 넘나들며 정보를 발굴하고 취사선택하는 능동적인 것으로 확장된다. 온라인 콘텐츠를 종이에 인쇄하는 행위는 단순히 정보의 포맷만을 치환하는 것이 아니라, 정보의 성격은 물론 독자의 역할까지 근본적으로 변화시킨다.
따라서 우리는 전자 출판 이후(포스트디지털 프린트)에 대해 논의할 때, 문서의 전자적인 성질을 단순히 정보 전달 방식의 차이로만 이해하는 것을 넘어 정보의 흐름, 연결성, 그리고 협업 등 확장된 차원에서 재고해야 한다. 지금은 이러한 전자 출판의 방식과 가능성을 재점검할 시점이지, 이를 다시 인쇄물로 재생산할 시점은 아니다.
2. 자유로운 문서 포맷
‘자유로운 문서’란 무엇인가?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할까? 어떻게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일까?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문서의 포맷은 자유로운가? 이 장에서는 오늘날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문서 포맷의 메커니즘을 들춰보고, 앞으로 등장할 새로운 문서의 포맷을 자유로운 문서 포맷(Free Document Format)이라 이름 짓고 그 특성을 제안한다.
2.1. 흐르는 문서
2.1.1. 유리 아래의 종이를 벗어나기
자유로운 문서 포맷은 유리 아래에 박제되어 있어서는 안 된다. 이 주장을 이어가기 위해 우선 PDF를 들여다보자. PDF(Portable Document Format)15는 미국 어도비 시스템즈(Adobe Systems)에서 만든 문서 포맷이다. 1993년 어도비가 PDF 1.0 버전과 아크로뱃(Acrobat) 1.0 버전을 발표한 이래 현재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문서 공유 포맷으로 자리 잡았다. PDF의 가장 큰 장점은 어떤 환경에서도 원본 문서의 내용과 형태를 그대로 재현해 낼 수 있다는 점이다. 암호화 및 압축 기술을 통해 변조가 어려우며, 열람과 편집에 대한 사용 권한을 설정할 수 있으며, 호환성이 높은 것도 장점으로 꼽힌다.
PDF는 텍스트의 내용과 조판 상태를 완벽하게 저장하여, 원본을 ‘그대로’ 공유할 수 있게 하는 일종의 데이터 덩어리이다. 이 ‘무결성’은 PDF가 가진 고유의 특성으로, 이것을 이유로 어도비는 PDF가 문서를 저장하고 읽는 데 가장 적합한 포맷이라고 전 세계를 설득했다. 하지만 테드 넬슨16이 전자 문서를 설명할 때 사용한 비유처럼 PDF는 유리 아래 종이(paper under glass)에 불과하다. PDF는 마치 종이에 인쇄한 문서와 같이 원본을 그대로 공유할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종이가 가진 힘과 매력까지 스크린으로 옮기지는 못했다. 읽기에 편리하지도 않으며 물리적인 종이처럼 마음대로 메모나 주석을 남길 수도 없다. PDF 문서를 진짜 종이 위에 출력하여 읽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2.1.1.1.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을 원한다면
탁상출판은 마이크로소프트 워드 같은 ‘위지윅’ 워드프로세서로 문서를 작성하여, 인디자인과 같은 ‘위지윅’ 그래픽 소프트웨어로 디자인한 다음 PDF 포맷으로 내보내어 종이에 인쇄한다. 위지윅(WYSIWYG)은 What You See Is What You Get의 약자로 현재 사용되고 있는 편집 소프트웨어 인터페이스의 지배적인 패러다임이다.17 결과물을 실시간으로, 눈으로 확인하며 편집이 가능한 시스템을 의미한다. 하지만 위지윅은 최종 결과물의 형태만을 표면에 드러내고 과정이나 맥락의 복잡성은 숨겨 버린다. 사용자는 자신이 보지 못한 이면에서 어떠한 과정을 거쳐 결과물이 구체화 되었는지 알 수 없을뿐더러, 위지윅이 구현해 주는 데로만 명령을 내릴 수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함정에 빠진다. 이것은 그래픽 소프트웨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어도비 그래픽 소프트웨어는 종종 캔버스(Canvas)라는 은유를 사용하는데 사용자가 이러한 은유에 갇히게 되면, 물리적인 캔버스에서 벌어질 수 없지만 - 컴퓨터에서는 가능한 것을 상상하는데 제약을 받는다.
PDF에도 비슷한 문제가 있다. 전통적인 인쇄의 개념이 뿌리 깊이 자리 잡고 있는 PDF의 경우, 눈에 보이는 정보들은 구조화된 데이터가 아니라 체계 없이 뒤섞여 고정된 데이터 뭉치이다. PDF 문서를 인쇄물로 변환할 경우 사진처럼 출력하여 눈에 보이는 그대로 재현할 수 있지만, 웹이나 전자책 혹은 다른 포맷의 전자 문서로 변환할 경우 (마크업 언어처럼 보이지 않는 뒤편에 서식과 구조가 숨겨져 있지 않기 때문에) 모든 페이지를 일일이 새롭게 구성해야 한다. 더구나 일반적인 위지윅 방식을 따른다면 바느질 같은 수공예 조판 작업을 일일이 거쳐야 한다. 우리는 익숙하게 사용하고 있는 위지윅 인터페이스에 속아 이것이 무수한 반복 노동을 요구하는 불편한 과정임을 자각하는 것마저 잊곤 한다.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을 원한다면, 보이지 않는 것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서식과 구조(style and structure)를 기반한 문서 설계를 수면 위로 올릴 시점이다.
2.1.2. 액체 레이아웃
다양한 변화를 거쳐 웹은 진화해 왔지만, 그 목표 지점이 인쇄물의 복제품이었던 적이 없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웹이라는 무한의 세계를 단순히 사각형 웹 ‘페이지’의 집합으로 이해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수많은 페이지의 묶음, 일종의 거대한 코덱스(Codex)18로 여기기도 한다. 페이지라는 개념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해서 무의식적으로 웹의 세계에 투영되어 있고, 이는 다시 웹에 대한 우리의 인식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정보 디자인에 대한 글을 쓰는 에드워드 터프티(Edward R. Tufte)는 물리적인 세계와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 사이의 부조화를 인식하며 웹 디자인 상황에서 직면하는 문제를 설명하고자 했다. “우리는 3차원 공간의 지각 세계를 매일 탐색하고 수학적으로 쉽게 더 높은 차원의 영역에 대해 때때로 추론하지만, 우리의 정보 디스플레이에 묘사된 세계는 종이와 비디오 화면의 끝없는 평지의 2차원성에 사로잡혀 있다”(루빈, 2019).
댄 루빈(Dan Rubin)은 ‘페이지를 넘어서(Off the Page)’라는 글을 통해 스크린 위의 텍스트는 제목 그대로 이제 ‘페이지를 넘어서’야 한다고 얘기한다.19 그는 종이 문서의 정적 레이아웃(fixed layout)과 달리, 브라우저의 크기와 비율에 반응하는 웹사이트를 설명하며 액체 레이아웃(Liquid Layout)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페이지에 블록을 만들고 블록에 텍스트를 짜맞추는 정적 레이아웃에 반해, 액체 레이아웃에서 텍스트는 물처럼 흐르며 상황에 따라 자유롭게 배치된다. 액체 레이아웃은 UI 디자인에서 널리 사용하고 있는 개념인 자동 공간 조정(Reflowable)과 맞닿아 있기도 하다. 자동 공간 조정은 서로 다른 디바이스에서 텍스트 정렬을 최적화하는 것을 뜻하는데, 텍스트가 ‘액체’처럼 유동적인 상태인 것을 기본으로 한다. 여기서 유동적인 상태란 단순히 텍스트를 무책임하게 풀어놓는 것이 아니라, 명확한 구조와 규칙 아래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변화할 수 있도록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다. 이 가변적인 유연성은 전자 문서만이 가질 수 있는 고유의 성질로, 이 문서에서는 이러한 성질을 가진 문서를 흐르는 문서라고 부르기로 한다. 문장, 문단, 문서가 자유롭게 흐를 수 있는 패러다임의 전환이 찾아오면 문서는 앞으로 어떻게 변화할까? 종이 너머까지 흘러 2차원의 경계까지 넘을 수 있을까?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문서의 상상 가능한 미래이자 현실은 ‘흐르는 문서’일 것이다.
2.1.2.1. 어도비의 액체화
위지윅 소프트웨어와 PDF도 변화하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 워드와 인디자인을 함께 사용하여 PDF 포맷의 ‘대화형’ 출판물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어도비에 따르면 대화형 사용자 경험을 향상시키기 위해 문서에 추가하는 애니메이션, 비디오, 사운드 등을 대화형 요소라고 한다. 이를 전자책 포맷인 EPUB20 혹은 HTML로 자동 변환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결국 이것도 대화형 레이어가 일부 추가된 정적 레이아웃 문서에 머물고 있기는 하다. PDF 문서의 유연성과 관련해서는 최근 인디자인에서 PDF 문서에 ‘구조’를 추가하는 기능이 업데이트되기도 했다. 21
InDesign 내의 [Adobe PDF 내보내기] 대화 상자의 [일반] 영역에서 [태그 있는 PDF 만들기] 옵션을 선택하여 Adobe PDF를 내보내는 경우, 내보낸 페이지에 내용을 설명하고 헤드라인, 스토리, 그림 등의 페이지 항목을 식별하는 일련의 구조 태그가 자동으로 첨부됩니다. 문서를 내보내기 전에 태그를 추가로 지정하거나 기존 태그를 보다 자세하게 지정하려면 InDesign의 [태그] 패널을 사용합니다. InDesign 문서를 내보내기 전에 태그를 추가함으로써 Adobe PDF 문서의 액세서빌러티와 재사용을 향상시킬 수 있습니다.
PDF도 점차 수동으로 일일이 서식을 적용하는 대신 구조적인 스타일 정의를 사용한 방식을 지원하려고 하지만, 애초에 서식과 구조 기반 데이터 마크업 문서 제작 방식이 아니기 때문에 다양한 문서 형식을 운용하고 제작하는데 한계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정적 레이아웃 기반 (인쇄형) PDF가 조금이라도 유연성을 확보하려면 AI와 같은 자동화된 읽기 시스템을 통해 레이아웃을 억지로 뜯어 재구성 혹은 변환해야 한다. 2020년 어도비는 아크로뱃 리더기에 리퀴드 모드(Liquid Mode)22라는 새로운 읽기 모드를 추가했다. 작은 화면에서 PDF 문서를 편하게 볼 수 있도록 AI가 레이아웃을 자동으로 재배치하는, 다시 말해 흐르는 문서로 만드는 기능이다. 자체 AI인 센시(Adobe Sensi)23를 사용했다고 한다. 리퀴드 모드를 실행하면 자동으로 하이퍼링크로 작동하는 목차가 생성되며 사용자가 원하는 대로 글자크기, 글자사이, 글줄사이를 조정할 수 있는 기능이 활성화된다.
그렇다면 PDF를 읽고 다루는 것이 본래 기능인 아크로뱃 리더에, 액체 레이아웃을 위한 기능이 추가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도비는 2023년 5월 고객지원 웹 페이지에 ‘유동적 레이아웃 및 대체 레이아웃’이라는 안내 글을 게시했다.
[대체 레이아웃] 및 [유동적 레이아웃] 페이지 규칙을 사용하면 효율적으로 다양한 페이지 크기, 방향 또는 종횡비를 유연하게 설계할 수 있습니다. 여러 형식 및 크기로 출판할 경우 프로젝트에 가장 적합한 디자인 전략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수작업/반자동/완전 자동). 완전 자동화된 작업 과정에 의존함에 따라 디자인 제어의 정도가 줄어듭니다. InDesign은 채택된 전략에서 비용과 제어의 균형을 조절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개선 기능을 제공합니다.24
하지만 이 안내 글의 바로 아래 ‘자동 유동적 레이아웃 기반 출판은 호환 뷰어 기술이 없기 때문에 아직 사용할 수 없습니다.’라는 경고가 굵게 표시되어 있다. 결국 당장은 구현되지 않는다는 뜻이지만, 이런 변화의 시도는 긍정적이다. 하지만 무결성은 PDF라는 포맷의 존재 이유와도 같이 여겨지기에, 이 변화는 두 가지 질문을 낳는다. 여전히 PDF의 무결성은 유지되는가? 앞으로 PDF의 우선 가치는 무결성과 유연성 가운데 무엇이 되는가?
어도비는 혹시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하고 있을까? 현재 어도비 크리에이티브 클라우드(Creative Cloud)로 PDF 문서를 만드는 경우 ‘액체 모드’로 문서 보기를 전환할 것인지 묻는 경우는 없다. 따라서 여전히 PDF 문서 대부분에는 서식과 구조에 대한 설정이 포함되지 않았을 것이라 여겨지고, 이러한 PDF 문서를 리퀴드 모드로 열람할 경우 제작자가 의도한 바와 다른 형태로 레이아웃이 재배치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더구나, 이미 작성된 문서를 강제로 해체해서 임의로 재조립한 문서를 과연 어디까지 신뢰할 수 있을까? 이러한 문제들은 PDF라는 포맷의 역할에 대한 의문을 낳을 갈등의 시작이 될 것으로 보인다.
2.1.3. 흐르기 시작한 후에는
문서가 ‘유리 아래 종이’의 틀에서 벗어나 ‘흐르기’ 시작했다고 해서 모든 것이 마법같이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기존의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지도 않는다. 오히려 변화에 따른 새로운 고민이 생겨난다. 한가지 예를 들면, 종이책을 읽을 때와 같은 ‘물리적’ 단서를 스크린에서는 얻지 못한다. 마치 거리를 걸을 때 도시 공간을 머릿속에 매핑(mapping)하는 것처럼 우리는 책의 여러가지 속성을 지형지물 삼아 종이책을 하나의 공간으로 매핑하여 인지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내가 좋아하는 인용문이 책의 4분의 3 정도에 위치한 페이지의 왼쪽 상단에 쓰여있다는 정보를 감각으로 기억할 수 있다.’25 하지만 평평한 유리 화면에는 이렇다 할 물리적 요소가 없다. 이를테면, 종이책을 읽을 때는 이미 넘긴 페이지와 남아있는 페이지의 차이를 시각과 촉각을 통해 파악해 책의 어디쯤을 읽고 있는지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지만 스크린에서는 그러한 단서를 얻을 수 없다. 종이책은 시각에 더해 촉각, 후각과 같은 감각을 같이 제공하지만, 전자 매체는 주로 시각을 통해서만 인식된다. 또한 스크린은 역동적이고 지속적으로 변화하기 때문에 사진적 기억이 잘 작동되지 않는다. 스크린 자체는 물리적 변화없이 고정된 가운데, 그 안의 콘텐츠만 변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물성이 없는 문서는 어떤 ‘읽는 감각’을 형성해야 할까? 새로운 읽기 감각은 어떻게 디자인되어야 할까? 물성이 제거된 유리 아래의 문서, 페이지의 분절없이 무한히 스크롤 되는 문서를 만든다고 가정해 보자. 페이지 구분이 없는 스크롤링 문서가 어떻게 하면 종이책처럼 읽고 있는 지점에 대한 정보를 직관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까? 그래픽 디자인 관련 디지털 기술을 다루는 연간 출판물인 《 백 오피스(Back Office)》 26는 인쇄와 디지털 버전 두 가지 형태로 발행되는데, 그중 디지털 버전은 스크린 환경에서 독자가 ‘읽기 진행’을 체감할 수 있도록 특별하게 설계된 인터페이스를 보여준다. 웹 브라우저에 내장된 기본 스크롤에 의존하지 않고, 웹 페이지 내부에 별도의 마커를 삽입했다. 스크롤에 따라 상단에 현재 진행 상태가 실시간으로 퍼센트로 표시되고, 전체 글자 수와 현재까지 읽은 글자 수가 함께 카운트되어 표시된다. 이 기능은 독자가 독서 진행 상황을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하여, 종이책의 물리적 감각을 대체할 새로운 지각 방식을 제안한다.
색인(index) 시스템 또한 좋은 예시이다. 잘 만들어진 색인은 내용의 구조적 이해를 돕는, 아이디어의 지도가 된다는 점에서 매우 유용하다. 더구나 종이책과 달리 전자 문서의 색인은 자동으로 생성과 관리가 가능하며, 연결된 본문 내용과 곧바로 연결되는 하이퍼링크의 역할도 하기 때문에 책의 내용을 구조화한 입체적 지도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흐르는 문서의 형식을 고민할 때 주의해야 할 부분이 있다. 디지털 인터페이스에서 물리적인 사물의 외관이나 질감을 그대로 재현하여 사용자에게 익숙한 경험을 제공하는 디자인 방식을 스큐어모피즘(Skeuomorphism)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초기 스마트폰의 메모장 앱은 실제 종이 질감을 반영하고, 계산기 앱은 실제 계산기 기계 버튼과 닮아 보이도록 디자인되었다. 디지털 도서 애플리케이션이나 킨들(Kindle)27과 같은 전자책의 초기 모델들은 페이지네이션이나 종이의 넘김 효과를 구현해 종이책의 느낌을 흉내내도록 디자인되었다. 전자 문서의 양식에서 스큐어모피즘의 지배적인 영향력은 전자책 리더기의 페이지 넘김 애니메이션 유형을 아카이브한 크리스 하마모토(Chris Hamamoto)의 프로젝트 ‘스큐어모픽 라이브러리(Skeuomorphic Library)’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28 스큐어모피즘은 이처럼 새로운 기술에 대한 사용자의 심리적 거리감을 줄이는 데 기여했으나, 사용자가 새로운 기술에 익숙해지며 점차 이러한 흉내내기의 필요성이 약화되자 디지털 고유의 미감과 기능을 발현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는 평가를 받았다. 결국 스큐어모피즘의 교훈은, 물리적 물체의 모양과 기능을 단순히 따라 하고 대체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디지털만의 새로운 방식을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루빈은 궁극적으로 문서의 미래에 대해 던지는 질문의 답을 문서의 근본적 본질에서 찾으려고 한다. 루빈은 우리가 출판의 초기 시점, 다시 말해 가능성이 무한했던 시초의 순간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루빈은 자신의 글에서 스콧 맥클라우드(Scott McCloud)의 ‘무한 캔버스(Infinite Canvas)’여기서 무한 캔버스란 페이지가 아닌 창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스크린에서 볼 수 있는 콘텐츠 영역을 말한다.를 언급하며 우리가 페이지라는 물리적 제한에서 벗어나야 상상력의 한계에 도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29 맥클라우드는 웹코믹(Webcomics)과 같은 시각적 서사 형식에서, 웹 문서는 단순히 텍스트와 이미지를 나열하는 공간이 아니라, 서사 구조가 무한히 확장하는 것이 가능하게 하는 공간임을 주장한다. 디지털 환경에서 창작자는 지면의 분량이나 크기에 더 이상 제약을 받을 필요가 없다. 대신 텍스트와 이미지를 끝없이 연결하고 확장하여 유연한 서사 구조를 구축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맥클라우드는 책이 물리적인 제한을 벗어버릴 때, 연속적이고 비선형적 스토리텔링이 가능한 무한한 확장성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기술의 진보만이 아니라 새로운 서사 구조와 포맷의 등장을 의미한다. 더 이상 페이지의 물리적 한계에 제한받을 필요 없이 무한한 스크린 위에서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 우리는 이 새로운 가능성을 기반으로 창의적인 실험을 통해 디지털 소통의 진정한 잠재력을 탐구해야 한다.
우리는 경험, 감성 디자인, 콘텐츠 전략, 시각적 문법, 심리학, 사용성, 그리고 표준에 대해 길게 이야기하지만 이들 중 어느 것도 우리가 실제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혹은 우리가 이 놀라운 네트워크—와이어, 위성, 서버, 아이디어, 그리고 사람들—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근본적으로 도전하지 않는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과 웹의 구조에 대한 인식 사이의 불일치는 현재 이 매체가 가진 제약을 넘어서는 것을 방해해 왔다. 그로 인해 발생한 불확실성은, 만약 우리가 매체를 더 잘 이해했다면 굳이 해결할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르는 문제들에 대한 시간 낭비적인 논쟁과 토론을 초래했다. 예를 들어 정적 레이아웃 대 유동적 또는 액체 레이아웃에 대한 열띤 논쟁은 우리가 웹에서 페이지의 경계를 정확히 어떻게 정의하는지를 잘못 해석한 데서 비롯된 문제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또한 인쇄 용어인 ‘블리드(bleed)’와 ‘폴드(fold)’에 대한 오해로 인해 클라이언트와의 마찰이 발생했을 때 차라리 그 시간을 상호작용, 콘텐츠, 사용성에 대해 더 많이 논의했더라면 어땠을까? 이러한 논의에 수년간 쏟아부은 시간을 보다 쓸모 있게 사용했다면, 보다 크고 중요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루빈, 2019).
웹이 우리에게 던진 과제는 기술이 페이지의 개념을 어떻게 바꾸고 있는지 재빠르게 인지하는 수준의 것이 아니다. 웹에 대한 우리의 고찰이 매우 빈약하다는 것을 분명히 인정하고, 이 새로운 문서 포맷이 지닌 잠재력을 통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근원적인 탐구를 해나가는 것이다. 이를 통해 자유로운 문서 포맷이 유리 아래를 벗어나 어떠한 방식으로 흘러야 할지 방향을 모색해 보아야 한다.
2.2. 접근 가능한 문서
우리는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다양한 종류의 문서가 다양한 방식으로 널리 공유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문서의 접근성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대라는 말과 같다. 21세기의 출판 접근성 개념은 ‘모든 문서’를 ‘모든 포맷’으로 제공하여 ‘모든 독자’가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달리 설명하면, 정보의 흐름을 최적화하여 모든 사용자가 효율적으로 콘텐츠에 접근하도록 돕는 것이다. 접근 가능한 출판(Accessible publishing)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앞서 언급한 전자 출판의 특성을 갖는 새로운 문서 포맷이 필수적이다.
문서의 호환성이란 어떠한 환경에서도 콘텐츠가 정상적으로 기능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웹 문서가 어떠한 운영체제나 브라우저에서도 동일하게 실행되어야 한다는 개념이다. 호환성은 기계 가독성(Machine-readable)을 지니며 재사용 가능한(Reusable) 형식 ‘기계 가독성’은 컴퓨터가 별도의 처리 작업 없이 읽어낼 수 있는 문서 및 데이터의 성격을 가리킨다. ‘재사용 가능한’은 서로 다른 기기 및 프로그램에서 정보의 형태 (표와 그래프를 포함하는 문서)를 동일하게 출력하여 데이터를 재사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을 말한다. 30을 바탕으로 한다. 유연성을 바탕으로 한 사용자 중심의 설계로, 이해하기 쉬운 레이아웃과 콘텐츠를 손쉽게 찾을 수 있는 구조가 필요하다. 문서가 체계적인 레이아웃과 구조를 갖추지 못하면 상황에 맞추어 유연하게 변화(호환)될 수 없기 때문에, 문서 접근성도 충분히 확보할 수 없다. 이 문서에서는 호환성을 갖춘 문서를 접근 가능한 문서라고 부르려고 한다.
웹 접근성에 대해 현재 논의되고 있는 제안이나 아이디어를 자유로운 문서 포맷의 접근성에 관한 논의에 적용해 보면 어떨까? HTML, CSS, 마크다운 등 마크업 언어를 기반으로 설계된 웹 문서들은 모두 표준화된 규칙과 구조외 서식으로 되어 있다. 규칙을 따르는 것만으로도 정보가 논리적으로 배치되어 빠르고 효율적으로 정보를 소비할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진다. 정보가 규칙에 따라 구조화되어 있기 때문에 화면의 정보를 음성으로 출력하는 소프트웨어인 스크린 리더(Screen reader)31나 마우스 없이 키보드로 콘텐츠를 탐색하는 방식인 키보드 네비게이션(Keyboard Navigation)32도 사용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스크린 리더가 문서를 읽어내는 원리나 대체 텍스트가 적용되는 원리 등을 살펴보면 접근 가능한 문서가 무엇인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33
2.2.1. PDF 접근성
PDF 접근성(PDF Accessibility)이라는 개념이 있을 정도로, PDF는 ‘접근 가능한 출판’을 논할 때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문서 포맷이다. 많은 PDF 문서가 배포되지만 대부분은 접근성 기준을 충족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PDF는 무결성을 최우선으로 삼기 때문에 디바이스나 소프트웨어의 특성을 고려한 정보 제공의 최적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런 PDF의 특징은 때때로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예를 들어 스크린 리더는 PDF 문서의 텍스트와 이미지를 올바르게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일종의 유리 아래 종이인 PDF 문서는 정보를 마치 사진처럼 포착하여 박제한 것이기 때문에, 정보의 위계가 정리되어 있지 않고 뒤섞여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스크린 리더가 문서를 읽기 위해 파악해야 하는 텍스트의 순서, 표, 이미지(대체 텍스트)와 같은 요소가 올바로 인식되지 않고 뒤죽박죽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나아가 애초에 원본을 이미지 형태로 만들어 PDF 문서를 작성한 경우에는 문서 내의 정보를 검색하는 것마저 불가능하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PDF 접근성 기준을 따르는 것이 일반화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검색이 가능하도록 텍스트를 이미지로 만드는 것—이를테면 윤곽선 처리를 한다거나 레스터화 하는 것—을 피하고, 각 요소를 논리적인 순서로 배치하고, 제목이나 표와 같은 구조적 요소 태그를 붙이고, 삽입된 시각 콘텐츠에 대한 대체 텍스트를 충실히 입력해야 한다. 또한 스크린 리더와 같은 텍스트를 음성으로 변환하는(text-to-speech) 소프트웨어와 호환되는지 점검하는 것도 중요하다.
PDF의 접근성을 높이기 위한 시도는 적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DocAxess’34는 인공지능과 기계학습을 활용해 PDF 문서의 구조와 콘텐츠를 자동으로 분석해 접근성 표준에 맞게 수정해 주는 서비스로, PDF는 시각 장애뿐만 아니라 청각 장애, 인지 장애가 있는 사용자 모두에게 접근성을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DocAxess는 접근성의 개선을 위해 PDF 문서의 논리적 구조를 재정비하여 스크린 리더 소프트웨어가 내용을 올바르게 해석하도록 돕고, 시각 콘텐츠를 위한 대체 텍스트를 삽입하며, 복잡한 레이아웃의 경우 읽기 순서를 최적화하는 방식들을 사용한다. 35 이를 통해 PDF/UA(Universal Accessibility)36 및 웹 콘텐츠 접근성 지침(Web Content Accessibility Guidelines: WCAG)37과 같은 표준을 준수할 수 있도록 한다.
‘AcceDe PDF Project’38는 접근성 높은 PDF 문서를 작성할 수 있도록 돕는 가이드를 제공한다. PDF 문서의 모든 요소에 태그를 붙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는데, 이를 통해 텍스트뿐만이 아니라 이미지나 표와 같은 여러 형식의 콘텐츠도 동일한 정보 접근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39 기존 PDF 문서를 개선하여 접근성 기준을 충족하도록 돕는다는 점에서 DocAxess와 비슷한 목적을 추구하지만, 사용자에게 그 방법을 더욱 직접적으로 안내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결국 자유로운 문서 포맷이 높은 접근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접근성에 대한 깊은 이해와 이를 구현하기 위한 체계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이는 PDF 문서 역시 예외가 아니며, 문서를 ‘내보내는’ 단계뿐만 아니라 기획하고 만드는 단계에서부터 고려되어야 한다.
2.2.2. 대체 텍스트: 같이 읽기 위해
대체 텍스트(Alternative Text: Alt Text)는 웹 문서에 포함된 시각 콘텐츠를 텍스트 형태로 제공하는 정보를 말한다. 스크린 리더와 같은 소프트웨어를 사용하면 대체 텍스트가 음성 혹은 점자로 출력되어 시각장애인도 시각 콘텐츠에 접근할 수 있다. 스크린 리더는 화면에 띄워진 텍스트를 읽어 나가다가 사진, 그림, 그래픽과 같은 시각 콘텐츠를 만나면 웹 문서의 코드에서 해당 콘텐츠의 대체 텍스트를 찾아 읽어준다. 이처럼 대체 텍스트는 문서에 대한 시각적 접근이 불가능한 사용자의 접근성을 보장하기 위한 대한 비시각적 대안으로 작동한다.
대체 텍스트는 새로운 상상력과 창작을 이끄는 원천이 되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시로 ‘Alt Text as Poetry’ 프로젝트가 있다.40 Alt Text as Poetry는 예술가 보자나 코클리아트(Bojana Coklyat)와 피네건 섀넌(Finnegan Shannon)의 협업으로 사려 깊고 창의적인 방식으로 대체 텍스트에 접근해 보는 프로젝트이다. 참가자들이 함께 모여 대체 텍스트를 일종의 시로 재구성하고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쓰기 연습을 하는 워크숍으로 프로젝트는 진행된다. 이들은 이런 방식을 통해 대체 텍스트를 쓰는 경험이 새로운 창작의 방편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들이 발간 중인 책(workbook) 역시 프로젝트의 강령을 형식으로 표현하고 있는 듯 강렬하다. 대체 텍스트 및 Alt Text as Poetry에 대한 소개 글과 일련의 글쓰기 연습이 포함된 이 책은 마이크로소프트 워드 포맷, 구글 도큐먼트 포맷, 사운드 클라우드 오디오 포맷, WAV 웨이브 폼 오디오 포맷, PDF 포맷으로 제공된다. Alt Text as Poetry의 웹사이트 또한 범상치 않은데 고대비 모드가 마련되어 있으며, 버튼이 매우 크다. 대체 텍스트뿐만이 아니라 정보의 위계 설정과 시각적인 구조 역시 문서 접근성을 확장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대체 텍스트가 웹 문서의 접근성을 높여주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대체 텍스트도 문서의 접근성을 높이기 위한 여러 고려 사항 가운데 극히 일부임을 잃지 말아야 한다. 웹 뿐만이 아니라 어떠한 포맷의 문서이건 보다 높은 접근성을 가질 수 있도록, 기존의 틀에 갇히거나 안주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2.3. 연결된 문서
자유로운 문서 포맷은 높은 연결성을 가져야 한다. 그 이유를 웹에서 찾아보기로 하자. 링크를 클릭해서 다른 글이나 이미지로 옮겨갈 수 있게 만든 웹 문서를 ‘하이퍼텍스트’라 부른다. 웹 문서의 동의어가 된 하이퍼텍스트는 정보의 추가 제공과 문서 간의 상호참조를 돕기 위해 고안된 기술이다. 웹은 처음부터 문서 중심으로 제작되었다. 웹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팀 버너스 리(Tim Berners-Lee)가 1989년 월드와이드웹을 고안했을 때 그 형식은 하이퍼텍스트 문서였다.
하이퍼텍스트 개념을 처음으로 고안한 사람은 테드 넬슨(Theodor H. Nelson)으로 인터넷의 아버지라 불리기도 한다. 테드 넬슨은 컴퓨터가 인간의 사고를 확장하고 인간의 자유를 증진할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하이퍼텍스트를 통해 비선형적 사고를 구현하고, 텍스트 사이의 자유로운 연결을 가능케 하는 기술을 꿈꿨다. 이와 같은 개념은 이후 제너두 프로젝트(Project Xanadu)41로 구체화되었고, 월드와이드웹뿐만 아니라 데스크톱 컴퓨터 인터페이스, 네트워크 에이전트, 마크업 언어와 같은 오늘날 기술들의 기초가 되었다. 비록 제너두 프로젝트는 여러 이유로 널리 사용되지 못했지만, 테드 넬슨의 비전은 오늘날 웹과 하이퍼미디어의 근간을 이룬다.
종이책의 구성은 수 세기를 거치며 체계화되었다. 문장이 모여 문단을 성하고, 문단은 서론, 본론, 결론의 형태로 완결된 구조를 갖는다. 추가 정보는 주석으로 처리해 흐름이 끊기지 않게 한다. 텍스트는 왼쪽 혹은 오른쪽에서 시작해 반대편으로 향하는 선형성을 갖는다. 그런데 하이퍼텍스트는 이런 선형성을 파괴한다. 하이퍼텍스트는 근본적으로 종이책에서는 구현이 불가능한 텍스트의 짜임으로 이루어진 상호텍스트(interactive text)이다. 디지털이라는 세계가 열리며 함께 등장한, 아날로그로 재현할 수 없는 디지털의 고유한 속성이다. 소설가이자 교수인 로버트 쿠버(Robert Coover)는 자신의 에세이 ‘책의 종말(The End of Books)’에서 이런 변화를 분명하게 묘사했다. “인쇄된 문서들은 초공간(Hyperspace)에서 읽힐 수도 있다. 하지만 하이퍼텍스트는 인쇄물로 번역되지는 않는다.”42
선형으로 쓰이고 읽히는 종이책의 텍스트와는 달리 하이퍼텍스트는 작은 단위의 비선형적 연결을 기반으로 한다. 일종의 연결망으로, 상호작용적이며 다성적인 하이퍼텍스트는 탈중심화할 수 있는 동시에 재중심화할 수 있다. 수많은 정보가 촘촘히 ‘연결된 문서’ 속에서는 때로는 예상치 못한 연결이 발생하여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기도 한다.
미국의 하이퍼텍스트 이론가 조지 P. 랜도우(George Paul Landow)는 1990년대 초부터 이 분야의 연구 선구자로서 디지털 기술과 전자 매체가 언어와 문학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선도적인 이론을 제시해 왔다. 그는 1992년에 《하이퍼텍스트: 이론, 비판 그리고 새로운 문학(Hypertext: The Convergence of Contemporary Literary Theory and Technology)》이라는 저명한 저서에서 하이퍼텍스트를 포스트구조주의와 탈중심화 이론(특히 롤랑 바르트, 미셸 푸코, 자크 데리다의 사상)을 통해 설명하며, 전통적인 종이책의 텍스트와 비교해 하이퍼텍스트의 비선형성, 상호참조성, 다성적인 읽기 방식을 강조했다. 이후 1997년 《하이퍼텍스트 2.0》에서는 초기 인터넷과 웹 브라우저의 발전을 고찰하며, 하이퍼텍스트의 실질적 구현 가능성을 검토했다. 그리고 가장 최근 저서인 2006년 《하이퍼텍스트 3.0》에서 랜도우는 2000년대의 발전된 웹 기술과 블로그를 필두로 한 디지털 미디어 환경의 성장을 사례로 들며 하이퍼텍스트가 소극적인 독자들을 적극적인 독자로 전환할 힘이 있음을 강조한다. 랜도우는 하이퍼텍스트가 단순히 텍스트를 연결하는 기술적 도구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형태의 협력적 지식 생산과 학습 방식의 기초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이퍼텍스트는 페이지 형식으로 묶인 종이책에서는 불가능한 상호텍스트성을 구현하고, 하이퍼텍스트 속의 링크는 ‘적극적 읽기’ 행위를 만들어 낸다. 이를 저자와 독자 간의 비동시적 협업 형태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이퍼텍스트는 독자가 탐구 경험에서 각자의 중심점을 설정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 하이퍼텍스트를 통해 독자는 스스로 정보를 조직하고 새로운 지식을 창출할 수 있으며, 이는 교육, 학문, 그리고 출판의 혁신을 이끌 수 있다. 테드 넬슨, 로버트 쿠버, 조지 P. 랜도우 그리고 하이퍼텍스트의 정치적 함의를 다루면서 작업하는 많은 이들은 이 기술이 본질적으로 자유주의적이며 민주적인 혁신의 씨앗임을 일찍이 주장해 왔다.
하이퍼텍스트가 우리 삶에 침투한 지도 벌써 수십 년이 지났고, 이제는 더 이상 새로운 개념도 아니다. 또한 하이퍼텍스트는 우리의 읽기 패러타임을 완전히 바꾸어 놓지도 못했다. 그러나 하이퍼텍스트를 처음으로 고안한 테드 넬슨의 말한 ‘컴퓨터의 궁극적인 지향점은 인간의 자유’라는 가치관은 지속되어야 한다. 자유로운 문서 포맷에서도.
2.4. 자유로운 문서 포맷
PDF 포맷이 출판 산업에서 마치 표준과 같이 사용되고 있지만 접근 가능한 문서가 되기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 정적 레이아웃을 유지하도록 설계되어 있기에 다양한 디바이스 환경에 유연하게 대응하지 못하여, 하이퍼미디어 개념을 내포하지 않아 다양한 미디어와의 상호작용 및 동적 정보 연결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PDF를 대체할 자유로운 문서 포맷의 등장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유리 아래의 종이를 벗어나, 액체 레이아웃을 바탕으로 한 흐르는 문서 개념에서부터 다시 사고를 시작해야 한다. 이는 페이지 중심의 종이책 문화를 탈피한 패러다임의 전환을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액체 레이아웃 기반의 문서 포맷은 다양한 기기와 사용자 요구에 맞춰 동적으로 변형되는 텍스트를 가능하게 한다. 디바이스(혹은 플랫폼)별로 문서를 재설계를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디바이스에서 같은 방식으로 잘 읽을 수 있게 하는 ‘구조’ 디자인이 필요한 것이다. 이는 디자인과 형식의 재인식이자 전복이다.
구조를 사용하여 콘텐츠를 수집하고 맥락화하는 도구를 만든다. 맥락은 구조가 되고, 구조는 맥락이 된다. 책 전체가 나무처럼 줄기, 가지, 잎사귀로 이루어지듯 책의 모든 기능을 계층 구조에 배치한다.
적확한 구조를 따라 텍스트를 흐르게 한다면, 반복적인 디자인 과정에서도 해방될 수 있다. 투자할 수 있는 모든 여건은 좋은 금형을 설계하고 만드는 데 쓰는 것이다.
전자 출판의 본질적인 연결성은 자유로운 문서 포맷을 더욱 필요하게 만든다. 자유로운 문서 포맷은 하이퍼텍스트 개념이 잘 적용되어 정보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문서 구조를 통해 전자 문서 고유의 장점을 잘 반영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방식은 정보 접근성뿐만 아니라 사용자 경험도 극대화할 수 있으며, 다양한 미디어와 콘텐츠를 통합할 수 있는 확장성을 제공한다.
또한 전자 출판의 민주적 특성은 출판의 생산과 소비 과정에서 상호작용을 증진하고, 출판물에 대한 접근성을 극대화하는 데 유리하다. 루스 마이어(Ruth Mayer)의 말을 빌리자면 ‘모두에 의해 쓰이고 보완되고 읽힐 수 있는 궁극의 텍스트, 즉 완벽한 책’43이다. 디지털 출판 환경에서는 기존 출판과 달리 누구나 쉽게 콘텐츠를 생산하고, 동적으로 소비할 수 있는 열린 구조가 가능하며, 이는 다양한 사용자들에게 여러 이점을 제공한다. 따라서 진정한 전자 문서의 형식은 단순히 종이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종이에 인쇄될 수 없는 완전히 새로운 전자성’을 갖춘 문서로 정의될 수 있다. 이와 같은 새로운 전자 문서 포맷은 출판과 정보 공유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며, 이를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지식과 정보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할 것이다.
전자 출판 환경에서 ‘서식’과 ‘구조’의 규칙을 지켜 작성한 문서는, 하나의 텍스트를 다양한 형태로 표현하고 공유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디바이스에서 무한히 재사용할 수 있다. 물론, 규칙을 충실히 따르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지만, 종이를 넘어서는 진정한 전자 문서가 작성되기 위해 반드시 수행해야 할 노력이다. 유연성, 접근성, 연결성을 갖춘 ‘자유로운 문서 포맷’을 탄생시킬 실마리는 바로 여기서부터 찾아나갈 수 있을 것이다.
3. 도구 사용의 자유
문서를 작성하고 생산하는 데 개입하는 기술과 포맷을 제대로 이해하면 앞으로 우리는 어떤 변화를 만들 수 있을까? 나아가 현재의 기술로 새로운 문서 포맷을 만드는 방법은 무엇일까?
유연성, 접근성, 연결성이 뛰어난, 이른바 자유로운 문서 포맷을 출현시키기 위해서는 원고 작성부터 인쇄까지 출판 과정 전반의 변화가 필요하다. 현재 출판을 위해 사용되는 소프트웨어, 예를 들어 마이크로소프트 워드나 인디자인은 아날로그 방식의 인쇄와 데스크톱 출판을 위해 만들어졌다. 마이크로소프트 워드로 작성한 .docx 포맷의 원고는 마크업 언어와 같은 구조화 개념이 없어, EPUB 포맷과 같은 전자 출판물로 만들려면 문서 소스 변환기인 판독(Pandoc)44이나 전자책 변환 소프트웨어인 칼리브레(Calibre)45와 같은 소프트웨어를 사용해야 하는데, 이는 많은 수고와 시간이 드는 일이다.
이처럼 우리가 사용하는 도구들은, 실제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기능을 충분히 제공하고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 스스로 필요한 도구를 새롭게 고안하여 사용한다는 생각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다. 이 장에서는 오픈 소스 디자인(Open-Source Design), 오픈 디자인(Open Design), 오픈 소스 출판과 같은 개념을 살펴보고, 이를 통해 문서를 작성하는 과정이 얼마나 도구에 종속되어 있는지 확인한다. 그리고 이로부터 해방되는 방안으로 디지털의 역할을 짚어본다.
이 장에서는 보편적인 소프트웨어를 사용하지 않고 문서를 작성할 수 있는 오픈 디자인(Open Design) 개념과 오픈 소스 디자인(Open-Source Design)을 살펴본다. 이를 통해 문서를 작성하는 과정이 얼마나 도구에 종속되어 있는지 확인하고, 이로부터 해방되는 방안으로 디지털의 역할을 살펴본다.
3.1. 도구의 독점 거절하기
모든 책이 하나의 소프트웨어를 통해 제작되는 현재의 상황은 그야말로 기형적이다. 마치 지구 위의 모든 사람이 같은 연필을 사용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것도 손에 쥔 연필이 어떤 원리로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지도 못한 채 말이다.
개발자이자 작가인 아드리안 바르트(Adrian Ward)는 ‘자동 일러스트레이터(Auto-Illustrator)’46라는 작품을 통해 소프트웨어와 사용자 가운데 누가 주체성을 가지고 창작을 통제하고 있는지 들여다보았다. 자동 일러스트레이터는 어도비 일러스트레이터와 유사한 인터페이스를 가진 일반적인 그래픽 툴처럼 생겼다. 그러나 실제로 사용을 시작해 보면 명령을 따르지 않고 엉뚱한 작업을 수행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사용자는 스크린 위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상황을 이해하기 어렵기에 전혀 상황을 통제할 수 없다. 자동 일러스트레이터는 이렇듯 사용자가 무력해질 수밖에 없는 현실의 구조적인 문제를 역설적인 방법으로 드러낸다. 고도로 기술화된 디지털 환경에서 사용자는 도구를 장악하는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폭로인 동시에 작동 원리도 이해하지 못하는 소프트웨어로 생산한 결과물의 소유자는 과연 누구인지를 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3.1.1. 독점 소프트웨어
이러한 상황에서 특정 소프트웨어가 한 산업의 표준 역할을 하고 있다면? 법적인 관점에서는 달리 해석되겠지만, 여기서는 시장 지배적인 소프트웨어들이 가지고 있는 압도적 위상을 드러내기 위해 독점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려고 한다. ‘독점’은 언제나 문제가 있으며 그것은 소프트웨어도 해당한다. 소프트웨어가 사용자를 장악하는 순간, 사용자는 도구에 대한 주도권을 박탈당한다. 더구나 독점 소프트웨어는 사용자가 작동 원리를 쉽게 들여다볼 수 없게 되어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를테면 어도비는 사용자가 소프트웨어를 개조할 수 있도록 권한을 개방하지 않고, 작동의 메커니즘도 철저히 가리고 있다. 이런 불투명성은 사용자를 도구에 종속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사용자는 소프트웨어가 제공하는 기능을 넘어서려는 시도를 주저하게 되고, 창의적 시도와 혁신은 요원해진다.
출판 산업도 이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생산 과정의 전산화와 함께 출판 노동자의 역할은 달라졌다. 과거의 식자공 혹은 인쇄공들은 생산 방식을 스스로 설계하고, 생산 도구를 개조하고 수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인디자인과 같은 탁상출판 소프트웨어를 다루는 노동자들은 자신이 사용하고 있는 도구를 개조하기는커녕 작동 원리를 완벽히 이해하기도 어렵다. 위지윅은 친절한 해결사처럼 모든 작업 과정을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지만, 그 편리함 만큼이나 사용자의 주체성을 약화한다. 위지윅이 친절해지면 친절해질수록 사용자는 그 기능에 종속되어 도구에 맞추어 생산하게되며 결국 자신의 필요에 따라 도구를 고안하고 개조하는 장악력을 잃게 된다. 말하자면 노동자의 역할이 출판 생산 과정과 생산 도구를 관할하던 지배적인 위치에서 탁상출판 소프트웨어의 소비자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3.1.2.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
하지만 우리에게는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Open Source Software: OSS)라는 가능성이 열려있다. 자유 소프트웨어(Free Software)와 자유-오픈 소스 소프트웨어(Free and open-source software: FLOSS)라는 개념도 살펴볼 필요가 있으나 여기서는 모두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라는 더 큰 우산으로 엮어서 이야기하기로 한다.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는 소스 코드가 공개되어 있기 때문에 누구나 그 메커니즘을 들여다볼 수 있고, 자유롭게 사용하거나 개조하는 것이 가능한 소프트웨어를 말한다. 우리가 도구를 이해한다는 것은, 단지 도구 자체를 사용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우리의 역할이 단순한 도구의 소비자가 아닌 도구 자체를 개조하고 생산할 수 있는 능동적 주체가 되는 것이며, 이는 도구의 가능성을 확장할 수 있는 창의적 자율성과 권한을 획득하는 것이다. 지속 가능한 창작의 측면에서도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는 중요하다. 특정 소프트웨어가 산업을 장악하고 있다면 소프트웨어를 이용하는 비용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없다. 하지만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를 사용한다면 상대적으로 경제적 부담이 적어지기에 보다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작업을 이어갈 수 있다.
또한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는 사용자 간의 협력을 장려하기에 여러 사람이 협력하여 소프트웨어의 기능을 개선하고 발전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독점 소프트웨어가 폐쇄된 방식으로, 일방적으로 기능을 제공하는 것과는 반대로 오픈 소스 환경은 열린 커뮤니티를 지향한다.
독점 소프트웨어는 여러 문제를 유발한다. 소프트웨어의 기능이나 사용 비용이 완전히 개발업체의 통제 아래 놓인다는 기본적인 것부터, 독점 상황에 종속된 사용자의 역할과 지위에 대한 것까지 고민할 지점이 적지않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용자는 어떻게 창작의 자유를 잃지 않을 수 있을까?47 우리는 도구의 소비자가 아닌, 도구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이는 도구에 대한 깊은 이해와 함께, 필요에 따라 도구를 변형하고 발전시키고자 하는 적극성을 요구한다. 우리가 도구에 대한 주도권을 완벽히 회복하는 순간, 창작자로서의 진정한 창의적 자율성을 회복할 수 있다.
3.2. 스스로 만드는 도구
오늘날 출판 산업에서는 PDF부터 EPUB까지 여러 포맷을 사용하며, 이런 포맷을 만들고 사용하기 위해서는 또다시 여러 소프트웨어가 필요하다. 그리고 앞서 살펴보았듯이, 도구에 종속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도구를 소유하고 장악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우리는 능동적인 도구 사용자가 되어 생산 과정에 필요한 도구를 스스로 고안하고 구성할 필요가 있다. 스스로 도구를 만들거나 선택해 도구 체인(Chain)을 구성하는 것은 일련의 생산 과정에서 당신에게 엄청난 자유를 준다. 만약 당신이 출판을 하고자 한다면 모든 과정을 혼자 해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도구 체인을 이해하고 ‘응용’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출판은 작가, 편집자, 디자이너와 같은 여러 역할들이 기획 - 원고 작성 - 편집 - 디자인 - 인쇄 - 제책 - 유통 등의 단계를 통해 완결되는 본질적으로 복합적인 (어찌 보면 사회적이기도 한) 과정이다. 그러나 도구 체인 문서를 제작하기 위한 연쇄적인 도구 사용 및 결합 프로세스를 도구 체인으로 일컬어 정리했다. 체인은 과정 혹은 세계관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을 관리할 수 있게 된다면, 이 모든 과정을 단축해서 (혼자서도) 출판이 가능하다. 먼저 각각의 도구가 작동하는 방식을 이해한다면 도구 간의 연계성을 발전시킬 수 있다. 서식 정보(스타일링)를 구조화할 수 있는 문서 작성 소프트웨어를 사용해서 문서를 작성하면 자동으로 편집 및 디자인 단계에서 작성 단계에서 설정한 문서 서식 정보를 연결할 수 있다. 특정 소프트웨어를 통해서 특정한 단계를 대체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주문형 인쇄 플랫폼을 사용하면 디자인 이후의 과정은 해당 소프트웨어에 역할을 맡길 수 있다.
3.2.1. 생산의 자유
이제 우리는 생산의 자유를 되찾아야 한다. 스스로 도구를 선택하고 이를 다룰 수 있는 주체적인 힘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오픈 소스의 중요한 특징은 우리가 소프트웨어 자체를 직접 수정하여 새로운 소프트웨어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데 있다.
독점 소프트웨어의 폐쇄적인 구조와 정형화된 기능과 달리 오픈 소프트웨어는 사용자가 필요한 기능을 스스로 확장해 나갈 수 있다. 예를 들어 웹사이트에 김프(GIMP)48를 연결하면 포토샵과 같이 이미지를 생성할 수 있다. 여기에 잉크스케이프(Inkscape)49를 연결하면 문서의 소스 코드를 확인할 수 있는 동시에 일러스트레이터와 같은 그래픽 작업이 가능하다. 시각적 표현과 텍스트 표현을 오가며 수정할 수 있는 것이다. 컴퓨터 역사상 가장 많은 참여자가 관여하고 있으며, 소스 코드가 공개된 대표적인 오픈 소스 프로젝트인 GNU50/Linux51의 철학을 살펴보면 “한 가지 일을 잘하는 프로그램들을 보유하라. 그리고 프로그램이 함께 작동하게 해라.”Unix Philosophy, “Write programs that do one thing and do it well. Write programs to work together. Write programs to handle text streams, because that is a universal interface.”라고 말한다.52 이렇듯 특정 기능을 가진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들을 결합하는 방식으로 필요한 기능을 모두 갖춘 궁극의 작업 도구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진정한 자유로운 문서 포맷은 작성과 제작 과정에 필요한 도구에 대한 진입장벽이 낮아야 할 것이며, 여기에는 경제적 문제도 포함된다. 누구에게나 개방된 무료 도구, 다시 말해 오픈 소스의 이용은 도구의 민주화를 의미하는 동시에 자본과 기업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진정한 창작의 자유를 보장하는 첫걸음이 될 수 있다.
3.2.1.1. 오픈 디자인
오픈 디자인은 누구도 독점하지 않는 디자인, 누구나 할 수 있는 디자인을 말하는 개념53이다. 오픈 디자인에서는 누구에게나 디자인 설계가 공개되고, 범용적인 디자인 포맷으로 누구나 소스 코드에 자유롭게 접근하여 수정하고 배포할 수 있다. 그 결과 협업을 통한 디자인의 개선, 수정, 확장의 지속적인 순환이 가능해진다. 협업을 통해 외부 자원을 활용함으로써 생산력과 혁신력을 확대하는 것이 오픈 디자인의 주목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열린 구조를 출판에 대입하면, 폐쇄적인 출판 산업 구조를 보다 민주적으로 개방할 수 있는 기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적 관점에서 오픈 디자인은 공유, 호혜성, 협업, 평등을 강조하는 수평적 생산 구조이다. 이는 전통적인 상하 관계를 벗어나 사용자 중심의 유연하고 역동적인 창작 과정을 가능하게 한다. 전문가와 아마추어를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창작의 가능성을 여는 길이기도 하다. 소수의 전문가뿐만이 아니라 대중 스스로 직접 설계하고 제작하고 유통하는 기회가 열리는 것이다.54 이는 기존의 엘리트주의적 창작 방식을 해체하고 창작자가 더 큰 공동의 프로젝트 안에서 협력하는 방식으로 바뀌게 만들 수 있다.
3.2.1.2. 협력적 글쓰기
오픈 디자인 개념은 출판에도 적용된다. 원고의 작성 과정부터 모두 개방하고 협력하는 것이다. 협력적 글쓰기(Collaborative Writing)55는 소프트웨어나 플랫폼을 이용해 하나의 문서를 여러 저자가 실시간으로 공동 작성하는 방식을 말한다. 잘 알려진 플랫폼으로는 위키가 있다. 오픈 소스는 아니지만 대중적으로 널리 쓰이는 구글 독스(Google Docs)도 협력적 글쓰기를 위한 플랫폼이다. 이더패드(EtherPad)56, 헤지독(HedgeDoc)57, 크립토패드(Cryptpad)58와 같은 ‘패드’ 개념 기반의 문서 작성 소프트웨어도 있다. 협력적 글쓰기에는 여러 장점이 있다. 글을 쓰는 과정에서 작업자 간의 즉각적 소통이 가능하기에, 여러 저자들이 의견을 나누며 동시에 글을 작성하는 것도, 디자이너나 편집자가 개입하여 저자에게 바로 의견을 전달하고 수정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렇듯 협력적 글쓰기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문서 작성의 한 방법으로 자유로운 문서 포맷이 지향해야 할 중요한 덕목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협력적 글쓰기가 효과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출판 기획 초기부터 어떤 방식으로 원고를 작성하여, 어떤 포맷으로 결과물을 생산할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선택한 방식에 따라 텍스트의 내용이나 성격까지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초기 단계부터 발행인, 저자, 편집자, 디자이너가 이러한 내용을 함께 논의하면 출판의 과정은 매우 유기적으로 작동할 수 있게 된다. 나아가 완성된 결과물이 열람 되는 방식도 달라질 수 있다. 문서 포맷 자체를 사용자 개개인 맞춤형으로 제작할 수도 있고, 주문형 출판 방식을 통해 아예 사용자가 포맷의 규격을 정하게 할 수도 있다.
협력적 글쓰기를 통해 저자와 독자 사이의 구분을 허물고 독자를 글쓰기에 참여시키고자 하는 시도도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오픈 휴머니티 프레스(Open Humanities Press)59의 《삶에 관한 살아 있는 책(Living Books about Life) 시리즈》60는 협력적 글쓰기의 선구적 사례 가운데 하나이다. 모든 책을 오픈 소스 위키 플랫폼을 통해 출판하여 독자가 내용을 편집하고, 주석을 달고, 번역하고, 리믹스할 수 있도록 했다. 그들은 이 모든 과정에 열려 있다는 의미에서 이 프로젝트를 ‘살아 있는’ 책이라고 명명했다고 설명한다.
3.2.1.3. 오픈 소스 출판
자유로운 문서 포맷과 오픈 디자인은 불가분의 관계라고도 볼 수 있다. 오픈 디자인의 관점에서,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를 출판 과정에 적극 활용하는 사례를 살펴보자.
OSP(Open Source Publishing)61은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 사용해 출판을 실험하고 혁신하는 단체이다. 2006년에 브뤼셀에서 설립된 이 단체의 핵심 철학은 기술적 독립과 상호 협력으로 그래픽 디자인과 출판물 제작의 전 과정을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는 툴로 수행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상용 소프트웨어가 아닌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를 통해 디자인을 수행함으로써 디자인 작업의 독점성을 탈피하고 누구나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는 출판 환경을 조성하려고 한다. 잘 알려진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인 잉크스케이프, 김프, 스크라이버스(Scribus)62, 폰트포지(FontForge)63 등을 주로 활용하여 그래픽 디자인, 타이포그래피, 웹 디자인까지 다양한 영역을 오가며 활동한다. OSP는 이러한 활동을 관습적으로 독점 소프트웨어를 사용하는 일반적인 출판 방식의 틀을 깨고, 필요한 도구 자체를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새로운 출판 시스템의 출현 가능성을 행동으로 열어가고 있다.
해커스&디자이너스(Hackers & Designers: H&D) 64는 디지털 기술과 디자인을 결합하여 창작 활동을 하는 협력 기반의 집단이다. 디자이너, 예술가, 개발자가 오픈 소스 기술을 기반으로 협업하여 출판 시스템을 구축하고, 이 시스템을 통해 창작자가 기술에 의존하지 않고 자율적으로 창작물을 제작, 편집, 공유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려고 노력한다. 예를 들어 해커스&디자이너스의 프로젝트 중 하나인 ‘프리 위키(Free Wiki)’ 65는 위키 기반의 지식 및 콘텐츠 저장소로 누구나 참여하여 정보를 작성하고 수정할 수 있는 플랫폼이다. HTML, CSS, Python 등 여러 오픈 소스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전통적인 출판 방식을 벗어나 자율성과 참여를 강조하는 출판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이들은 책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사용한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 소스 코드, 라이브러리 등을 온라인으로 모두 공개한다. 이들의 활동은 출판의 과정 자체를 모두 공유하는 새로운 방식의 디지털 출판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3.2.2. 공유의 자유
현재의 출판 시스템은 피라미드 구조이며 꼭대기에는 출판사와 유통업체가 자리 잡고 있다. 이들은 문서의 기획부터 문서 포맷(주로 물리적인 책)의 제작, 배포까지 모든 것을 통제한다. 하지만 피라미드의 바깥에서 출판을 감행할 수 있는 완벽한 대안으로 웹이라는 플랫폼이 등장했다.
웹은 자유롭게 문서를 공유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무료이며 즉각적이다. 다시 말해 개방형, 분산형, 실시간 게시 플랫폼이다. 일찍이 1990년대 말부터 자가출판 예술가들은 웹의 등장을 더욱 자율적으로 창작하고 공유할 기회로 여겼다. 웹을 기반으로 한 출판에 대한 관심은 기성 출판 산업에 대한 의존을 멈추고 예술적 자율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노력과 연결된다고도 볼 수 있다. 장 폴(Jean-Paul)이 1998년에 쓴 대로, “인터넷은 출판사와 유통업자와 같은 중개자로부터 자유롭게 한다. 무엇보다도 인터넷은 (소량의 부수지만) 인쇄물과 달리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에 형태를 준다. 인터넷 밖의 세상에서는 중개인들이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더 많은 가능성이 있는 곳들을 찾아야 한다.” (셀라, 핀다이센, 블라하, 2021).
결국 포스트디지털이 종이책이나 종이 문서를 억압하거나 대체한다는 오해와는 다르게 디지털 네트워크 기술은 인쇄물마저 더욱 잘 활용하고 공유할 수 있도록 만든다. 웹을 기반으로 한 출판 시스템은 모든 권한이 출판사나 유통업체에 집중되는 문제를 해결하고 독립된 방식으로 책이 생산되고 유통될 수 있도록 하는 환경을 조성하고 있으며, 이는 자유로운 문서 포맷이 지향하는 민주적 창작과 공유와도 동일한 목표를 공유한다. 원격 인쇄, 네트워크화된 실시간 유통, 주문형 인쇄 등의 등장은 종이 문서의 자유로운 배포에 힘을 싣고, 이는 소수의 발언이나 예술 표현의 자유와도 연결이 되기에 사회 정치적인 변화를 이끌 잠재성마저 지니고 있고도 볼 수 있다.
3.2.2.1. 주문형 인쇄
주문형 인쇄(Print on Demand: POD)는 주문이 들어온 후에 종이책을 인쇄하는 방식으로, 한 권씩도 제작하여 판매할 수 있는 소량 제작 시스템이다. 널리 알려진 주문형 인쇄 플랫폼으로는 ‘루루(Lulu)’66, ‘블럽(Blurb)’67 등이 있다. 유통을 위해서 한꺼번에 많은 책을 미리 제작해야 하는 사전 투자의 위험이나, 재고의 부담을 줄여주는 것이 큰 장점이다. 절판된 책을 필요할 때마다 소량으로 생산한다거나 내용에 변경이 생긴 경우 곧바로 적용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물론 대량으로 제작된 책과 같은 수준의 물리적 품질을 기대하기는 어렵지만 책의 생산과 소비에 대한 선택의 폭을 넓히는 기회인 것만은 분명하다.
주문형 인쇄의 또 다른 장점은 저자와 독자가 바로 연결될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저자가 웹을 통해 주문을 받고 주문형 인쇄로 종이책을 제작하여 독자에게 배송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주문형 인쇄를 통하면 출판사나 유통업체 없이 종이책을 생산하고 유통하는 것이 가능하다. 책의 생산과 유통에 대한 주도권을 출판사와 유통업체에 양도하는 것이 아니라 저자 자신이 통제하는 것이 가능한 출판 시장의 형태를 꿈꿀 수 있다.
한편 ‘아마존 킨들 다이렉트 퍼블리싱(Amazon Kindle Direct Publishing: Amazon KDP)’68처럼 종이책이나 전자책을 취급하는 유통업체가 소장한 콘텐츠를 주문이 올 때마다 종이책으로 만들어 판매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경우 주문형 인쇄보다는 주문형 출판이라는 용어가 더욱 어울릴 것 같다. 아직 큰 규모는 아니지만 국내에도 ‘부크크(BOOKK)’69, ‘교보문고 바로출판 POD’70 등의 주문형 출판 플랫폼이 운영되고 있다.
3.2.2.2. 행위로써의 출판
출판과 퍼포먼스를 결합하여 창작의 폭을 크게 넓힌 사례도 있다. 런던의 아티스트 콜렉티브 아이셰드(iShed)가 만든 ‘북 커널(Book Kernel)’71은 라이브 이벤트를 통해 독자와 저자가 실시간 상호작용 하면서 책을 만든다. 그리고 이벤트가 끝나기도 전에 책은 이미 완성되어 독자에게 전송된다.
앞서 언급한 해커스&디자이너스는 채팅의 형식을 차용한 ‘채티펍(ChattyPub)’72이라는 문서 작성 겸 디자인 플랫폼을 고안해 내었다.줄립(Zulip)이라는 오픈 소스 채팅 및 협업 소프트웨어를 기반으로 한다. 채티펍은 여러 사람이 채팅과 이모지라는 익숙하고 간단한 방식으로 문서를 작성하고 디자인할 수 있는 탈중앙화된 출판 도구이다. 해커스&디자이너스는 워크숍을 열고 참여자들을 초대해 출판물을 함께 제작하며, 다양한 사람들의 참여를 통해 결과물인 출판물 뿐만 아니라 도구도 함께 발전해나간다.
MIT 미디어 랩(MIT Media Lab)과 MIT 프레스(MIT Press)73에서 개발한 ‘펍펍(PubPub)’74은 연구자, 작가, 편집자들이 실시간으로 협업하여 콘텐츠를 작성하고 출판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오픈 소스 기반 협업 출판 플랫폼이다. 여러 사용자가 동시에 문서를 편집하고 주석을 달 수 있어, 공동 저작과 피드백이 용이하다. 펍펍을 활용한 대표적인 프로젝트로는 ‘프랑켄북(Frankenbook)’75이 있다. 프랑켄북은 메리 셸리(Mary Shelley)의 소설 《프랑켄슈타인(Frankenstein)》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디지털 및 물리적 형식으로 재출판 하려는 시도이다. 이 프로젝트는 독자와 저자가 실시간으로 상호작용을 하며 콘텐츠를 함께 만들어가며, 계속해서 수정되고 새로워진다. 웹 기반 플랫폼을 통해 누구나 프로젝트에 접근할 수 있으며, 독자들은 협업 주석을 달아 여러 대체 현실 스토리라인을 제시하거나 자신만의 버전을 만들어 다양한 경로로 이야기를 탐색할 수 있다.
3.2.2.3. 아카이브
오픈 소스 출판, 전자 문서 포맷과 전반적인 자율적 도구 체인과 관련해서는 다양한 온라인 아카이브가 있다. 아카이브를 통해 오픈 디자인의 확장이 가능하고, 커뮤니티 구성 및 확장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몇 가지 아카이브를 소개하려고 한다.
‘PrePostPrint’76는 오픈 소스 출판 워크플로우를 지지하는 플랫폼으로, 웹 문서를 인쇄물로 변환할 수 있는 도구를 소개하고 제공한다. 2017년에 사라 가신(Sarah Garcin)77과 라파엘 바스티드(Raphaël Bastide)78가 시작했다. 이들의 목표는 전통적인 출판 도구의 한계를 극복하고 ‘출판의 민주화’를 실현하는 것이다. 디자이너와 창작자는 상용 소프트웨어의 제한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출판 도구를 사용할 수 있어야 하며, 이를 통해 출판 과정 전반을 제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PrePostPrint가 소개하는 도구들은 HTML과 CSS를 활용한 출판 자동화에 집중하여, 상용 소프트웨어 없이도 출판물의 디자인과 출력 과정을 통합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Library of Artistic Print on Demand(APOD)’79은 주문형 인쇄를 통해 제작된 예술적인 책을 소개하는 플랫폼이다. 예술가들이 적은 경제적 부담으로 자신의 작품을 전 세계로 배포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하여, 주문형 인쇄가 예술 출판의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는 방식으로 작품의 자유로운 배포를 가능하게 하는 지속 가능한 출판 방식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P-DPA(Post Digital Publishing Archive)’80는 디지털과 인쇄 출판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포스트디지털 시대의 출판물을 기록하고 연구하는 아카이브다. 실비오 로루소(Silvio Lorusso)81가 주도하는 이 프로젝트는 출판 디자인에서 디지털 기술과 아날로그 매체의 융합을 탐구하며, 새로운 출판 방식들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기록한다. P-DPA의 의의는 단순한 기록 아카이브를 넘어서 출판물의 제작 과정과 그 속에 담긴 철학적 질문을 탐구하는 데 있다. 이는 출판 디자인이 단순한 결과물 제작을 넘어서, 그 과정과 맥락을 중시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P-DPA는 출판물 제작 과정에서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상호작용을 연구하는 중요한 자료로 기능함과 동시에, 출판 디자인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여 디자이너와 출판 관계자들이 디지털 기술과 아날로그 매체를 결합하여 보다 유연하고 창의적인 방법으로 작업할 수 있는 환경을 제시한다.
‘Web2print.org’82는 오픈 소스 출판물의 컬렉션83이자, 사용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FOSS/FLOSS 도구 체인을 통해 문서를 만들어 출력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을 목표로 하는 플랫폼이다. 그래픽 제작 과정에 대한 성찰의 하나로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예술가 루실 오트(Lucile Haute)84와 그래픽 디자이너 쿠엔틴 주헬(Quentin Juhel)85이 운영하며, 여러 장소를 순회하며 본인들이 소유한 컬렉션을 임시 도서관처럼 전시하기도 한다. 이들의 웹사이트에서는 (약간의 커스터마이징 이후에) 누구나 곧바로 전자 출판을 할 수 있도록 최적화된 문서 템플릿과 소스 코드를 제공한다.
오픈 소스 출판 및 전자 문서 포맷의 발전은 다양한 자율적 도구 체인과 온라인 아카이브의 출현을 통해 더욱 확장하고 있다. PrePostPrint, APOD, P-DPA, Web2print.org와 같은 아카이브 웹사이트들은 출판 디자인과 창작물을 보다 민주적이고 개방적인 환경에서 생산하고 공유할 기회를 제공하며, 오픈 디자인의 미래 가능성을 탐구하는 중요한 플랫폼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들은 각자의 목표에 맞추어, 출판물 제작 과정에서 창작자들이 더욱 자율적이고 창의적으로 작업할 수 있는 도구와 환경을 제공함으로써, 커뮤니티의 확장과 협력을 촉진한다. 또한 각각의 웹사이트는 아카이브의 역할 뿐 아니라 관련 분야의 강연이나 전시를 소개하는 역할도 한다.
이러한 아카이브들은 단순한 자료 저장소의 역할을 넘어, 출판물 제작 과정에서 저자와 독자, 창작자와 사용자 간의 상호작용을 강화하며 오픈 디자인이 어떻게 더 나은 협력 환경을 만들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다양한 아카이브가 존재하고 지속적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점은 물리적으로 연결되지 않더라도 관련한 커뮤니티의 구성 및 확장이 가능하다는 방증이다. 각 아카이브가 지향하는 목표에 따라, 출판 디자인의 미래는 더욱더 창의적이고 자유로운 방식으로 발전할 것이며, 이를 통해 오픈 소스 기반의 출판 문화는 더욱 확장될 것이다.
민주화! 우리는 시야를 넓혀 도구에 종속되지 않고 문서를 작성, 수정, 공유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문서를 만드는 도구와 보여주는 도구의 민주화는 자유로운 문서 포맷이 등장할 근간이 되어 줄 것이며, 열린 출판 시스템은 발행인에게 권한이 집중화되는 문제의 해결점이 되어 줄 것이다. 또한 우리는 기술을 이해하고 연마하여야 한다. 소프트웨어에 의존하지 않으려는 욕구를 통해 도구는 민주화되고, 이는 출판과 출판을 둘러싼 노동자들의 삶에 새로운 전환기를 불러올 것이다.
4. 이 문서에 대해
이 문서 《자유로운 문서 포맷》의 제작 과정을 소개한다. 이 문서는 자유로운 출판을 위한 도구와 문서 포맷에 대한 탐구의 결과를 담고 있다. 내용과 형식의 합일을 위해 출판 작업에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를 적극적으로 사용하였으며, 이를 통해 작업의 과정과 방식에도 자율성을 보장하려 했다. 도구 체인은 다음과 같은 소프트웨어로 구성되었다: 문서 변환은 판독(Pandoc), 인쇄용 PDF 생성과 페이지 기반 레이아웃 디자인은 Paged.js86, 이미지 조정과 커버 디자인은 스크라이버스(Scribus), 김프(Gimp)를 사용했다.
루도비코는 ‘인쇄는 해방하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해방적 힘으로써의 미디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자유로운 문서 포맷》은 독점적이지 않고 오픈 소스로 열려있다. 이 문서는 종이책으로 인쇄되었지만, 동시에 어디에서든지 접속하여 웹 브라우저를 통해 열람할 수 있도록 HTML을 기반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Git87 저장소에 패키지 형태로 저장되어 있기도 하다. 당신은 여러 가지 방식 중 선택해서 읽을 수 있다.
《자유로운 문서 포맷》 출판에 사용된 도구 체인(혹은 일종의 생태계) 또한 오픈 소스 원칙을 따라 CC4r(Collective Conditions for Re-Use)88 라이선스를 준수하여 만들어 졌다. CC4r은 지식 공유를 촉진하기 위해 상호주의에 중점을 둔 오픈 라이선스이다. 이 라이선스는 누구나 저작물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도록 허용하되, 파생된 저작물 역시 동일한 CC4r 조건으로 공개할 것을 요구한다. 이를 통해 파생 저작물이 다시 지식 공유 공동체로 환원되도록 한다. 특히 오픈 소스 디자인 및 출판 프로젝트에서 상호 혜택과 커뮤니티 성장을 촉진하는 데 의의가 있다. 《자유로운 문서 포맷》를 읽고 있는 당신도 이 문서를 다른 작업으로 이어가거나 연구, 비판, 재사용하는 게 가능하다.
또한 이런 도구 체인은 무엇을 만드는 데에 쓰이는 ‘실질적인 도구’소프트웨어, 프로그램, 장비, 기계, 프로그래밍 언어 등...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자유로운 문서 포맷》은 ‘Velvetyne Type Foundry’89의 오픈 소스 폰트를 사용하여 영문 텍스트의 타이포그래피를 구성했는데, 이는 자유로운 창작과 공유의 정신을 반영하고 있다. 프랑스에 소재한 Velvetyne은 오픈 소스 폰트를 소개하고 배급하는 비영리 서체 플랫폼으로, 폰트의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만들어졌다. Velvetyne의 활동은 단순한 폰트 배포에 그치지 않고, 더 많은 사람이 다양한 폰트를 사용하여 창의적인 협업을 하도록 장려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언뜻 보기에는 새로운 도구인 프로그램, 플랫폼, 코드들이 다소 복잡해 보이기 때문에 오픈 소스 출판 방식이 기교적이고 과시적인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자유로운 문서 포맷》이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은 기술의 흐름과 소프트웨어 문화에 대한 참여에 관한 것이다. (덧붙이자면, 과시는 커녕 오히려 기존 상용 소프트웨어가 필요로 하는 것보다 훨씬 저사양 컴퓨터로도 오픈 소스 출판은 충분히 이루어 진다.) 무한한 창작의 자유가 주어지는 이 세계를 이해하게 되면 디자인과 기술에 대한 인식이 완전히 새로워지게 된다.
긴 글을 마무리하며 질문을 다시 처음으로 되돌려보자. 문서의 포맷을 포스트디지털이라는 지금의 시각에서 새롭게 규정해야 한다면, 우리는 어떠한 문서를 상상해야 할까? 나아가 어떻게 새로운 문서 포맷과 출판의 형태를 만들어 갈 수 있을까?
